산업기술보호법·국가첨단전략산업법 강화 입법…간첩죄 개정해야
“정부, 외국 자본 통한 국가핵심기술 유출 방지 방안도 마련해야”

제21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6-3 ‘장미 대선’의 막이 올랐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6월에 치러지는 이번 선거는 지난 19대 대선과 마찬가지로 당선 확정과 동시에 대통령 임기가 시작된다. 차기 정부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없이 곧바로 출범하게 되므로 각 후보의 공약이 그대로 정책으로 반영되고 실행에 옮겨질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
특히 대한민국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경제 분야에서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과 무역전쟁, 급속도로 발전하는 과학기술 등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이어서 대선 후보들의 공약은 그 어느 때보다 주목받고 있다. 산업과 금융 등 특히 경제분야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향후 5년을 책임지려는 각 후보들의 분야별 공약을 입체적으로 조망해본다. [편집자 주]
① 캐즘·고관세·고환율 ‘삼중고’ 빠진 전기차 업계…“대선 후보들, 공약 전무(全無)”
② ‘K-방산’ 선점 공약 쏟아진다…‘4대 강국’ 가능할까
③ 1311만 청년층 표심 잡아라...대선 후보들 청년정책 포인트
④ 'K 주식시장 살리기' : 이재명 "코스피 5000 달성" vs 김문수 "박스피 탈출"
⑤ 대선 후보들, ‘장밋빛 AI 청사진’ 잇따라 제시 …정부 차원의 지원 절실해
⑥ 미래먹거리 투자 공약 앞다퉈 내놓은 후보들… 투자결과 지킬 방패 ‘산업기술 보호’ 나몰라라

[인더스트리뉴스 한원석 기자] 최근 대선 후보들이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분야를 비롯한 첨단 기술에 대한 대규모 투자 및 연구개발(R&D) 예산 확대 공약을 내걸며 표심에 호소하고 나섰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전국에 AI 데이터센터를 건립해 혁신거점으로 삼겠다며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본딴 ‘AI 고속도로’를 구축하고, 민관 합작으로 AI 분야에 100조원 규모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또한 ‘안정적 R&D 예산 확대’와 기초원천 분야에 대한 R&D 투자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도 AI 3대 강국 도약을 내세우며 AI 인재 20만명 양성과, AI 유니콘 기업 지원을 위해 글로벌 기업이 참여하는 민관합동펀드 100조원을 조성한다는 공약을 제시했다. 아울러 국가 예산 지출의 5% 이상을 R&D에 투자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과학기술기본법 제정도 약속했다.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AI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별도 공약은 없으나, 과학기술 연구자 지원과 규제 혁신을 통해 간접적으로 AI 산업을 육성하려는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렇게 막대한 국가 예산을 들여 R&D에 투자해 만들어낸 기술을 보호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아직 어느 후보도 구체적인 공약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술을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들여 만들어낸 기술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후보들이 간과한 탓이다.
◆ 4.3조 들인 삼성 반도체 핵심기술, 中에 유출해 회사 설립 후 시제품도 생산

실제로 한국 기업을 상대로 한 기술 유출은 그 건수와 피해 규모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삼성전자 상무와 하이닉스 부사장까지 지낸 반도체 전문가 최모 씨와 전직 삼성전자 수석연구원 오모 씨가 반도체 기술을 중국에 빼돌린 사건이다.
서울경찰청 산업기술안보수사대는 지난해 9월 6일 이들을 산업기술법 위반,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들은 지난 2014년 삼성전자가 4조3000억원 가량을 들여 독자 개발한 20나노미터(nm·10억분의 1m)급 D램 반도체 기술 관련 공정도 700여개를 중국의 반도체 업체 청두가오전에 넘긴 혐의를 받는다.
경찰에 따르면 최 씨는 삼성전자 퇴사 후인 2020년 9월경 중국 청두시로부터 약 4600억원 상당의 투자를 받아 ‘청두가오전 하이테크놀로지(CHJS)’라는 중국 기업을 설립했다. 오 씨 역시 최 씨가 세운 청두가오전의 임원을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2021년 12월경 청두에 반도체 D램 제조 공장을 세운 뒤 약 4개월 만인 2022년 4월경 중국에서 2번째로 D램 시범 웨이퍼 생산에 성공했다. 업계에서는 원천 기술 없이 새로운 세대의 D램 반도체를 개발하려면 통상 4~5년이 소요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 추가 수사 결과 최 씨는 청두가오전 지분 860억원 상당을 받고 보수 명목으로 18억원의 범죄 수익을 취득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지난해 해외 기술 유출 25건 적발… 중국 18건 ‘최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국수본)는 지난해 1~10월에 해외 기술 유출 사건 25건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특히 반도체·자동차·이차전지 등 국가 안보 및 경제와 직결되는 ‘국가핵심기술’ 해외 유출이 25건 중 10건에 달했다. 국가핵심기술 유출 적발 건수는 △2021년 1건 △2022년 4건 △2023년 2건 △2024년 10건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전체 기술 유출 사건에서 해외 유출 사건이 차지하는 비중도 처음 20%를 넘겼다. 유출 국가는 중국이 18건으로 가장 많았으며 미국 3건, 독일·베트남·이란·일본 각 1건씩이었다.
기술 분야별로는 디스플레이 8건(32%), 반도체 7건(28%) 순으로 주력 산업 기술 유출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죄종별로는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이 13건,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이 12건이었다.
앞서 본 사례 이외에도 반도체 관련 기술이 중국으로 유출된 사례는 한 두 건이 아니다. 국내 장비업체 대표 형제가 삼성전자 자회사 세메스의 반도체 세정 장비 기술을 유출했다가 적발됐고, 삼성전자 전 수석연구원이 D램 조립 기술 등 국가핵심기술 13건 및 영업비밀 100여건을 유출한 사례도 있었다.
SK하이닉스에서는 반도체 제조 및 세정 기술을 협력사 임직원 8명이 유출한 일도 있었다. 이달 7일에는 중국 기업으로 이직하기 위해 반도체 기술을 빼돌린 SK하이닉스 중국 법인 직원 김모 씨가 구속 기소됐다.
검찰에 따르면 김 씨는 화웨이의 자회사인 하이실리콘으로부터 이직 제안을 받은 다음, SK하이닉스의 이미지센서(CIS) 관련 기술 등을 무단 유출한 혐의를 받고 있다. 김 씨가 유출한 자료에는 AI에 사용되는 고대역폭메모리(HBM) 구현에 필수적인 ‘하이브리드 본딩’ 기술자료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 외국계 자본의 국내 기업 인수, 국가핵심기술 유출 ‘우회 통로’ 우려…고려아연이 대표적 사례

이 밖에 외국계 자본의 국내 기업 인수도 국가핵심기술 유출의 우회 통로로 활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최근에는 외국계 자본이 국내 법인이나 단체를 통해 우회적으로 지배권을 확보하는 방식이 교묘하게 활용되고 있어 우려를 낳고 있다.
문제는 현행 산업기술보호법령이 ‘외국인’을 외국 국적 개인과 외국법에 따른 법인으로 한정하고 있어, 실질적으로 외국 자본이 지배하는 국내 법인이나 단체가 법의 허점을 이용해 기술유출 통제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올해 입법 예고된 산업기술보호법 시행령 개정안에는 ‘외국인’의 범위 확대 관련 내용이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산업부는 지난해 말 발표한 ‘제5차 산업기술 유출방지 및 보호 종합계획(2025~2027)’을 통해 ‘지배권 행사 여부’를 기준으로 외국인의 범위를 조정하겠다고 밝혔지만, 정작 개정안에서는 이 핵심 내용이 빠졌다.
이와 관련해 지난달 21일 바른사회시민회의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한 목소리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외국계 자본이 국내 사모펀드를 통해 전략기술 기업을 인수해도, 현행 제도는 이를 외국인으로 간주하지 않아 실질적인 통제가 불가능하다”면서 “미국·일본·EU는 이미 실질 지배력 기준을 중심으로 제도를 재정비하고 있는 만큼, 우리도 외국인 정의를 실체 기반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산업기술보호위원회 산하에 M&A 전담기구를 실질 심사조직으로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최장욱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는 “핵심기술은 단순한 설계도나 문서로 남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간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가 결합된 결과물”이라며 고려아연의 제련기술 및 전략광물 기술을 그 예시로 들었다.
실제로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해 11월 고려아연이 보유한 ‘리튬이차전지 니켈(Ni) 함량 80% 초과 양극 활물질 전구체 제조 및 공정 기술’이 ‘국가핵심기술’에 해당한다고 판정했다. 전구체는 이차전지 양극재 핵심 원료 중 하나다.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경제안보, 기술안보 시대에 국가핵심기술 보호는 국가경쟁력 유지를 넘어 국가 존립의 필수 조건이다. 기술 유출 관련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 요구되는 이유다.
앞선 사례에서 유출된 기술을 바탕으로 청두가오전이 D램 최종 양산에 성공할 경우 한국 반도체 업체가 입을 피해액은 최소 수십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이를 엄벌로 다스려야 할 우리나라의 법은 솜방망이 처벌에 머무르고 있다.
해당 사건에서 무등록 헤드헌팅 업체를 차린 뒤 반도체 핵심 연구 인력들에 “기존 연봉의 최소 2, 3배를 보장한다”고 유혹하는 수법으로 중국 업체에 이직을 알선해 수억원을 받은 A씨에게는 직업안정법 위반 혐의만 적용됐다. 인력 유출은 산업기술보호법의 적용 범주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여야는 형법 98조의 간첩죄 적용 범위를 ‘적국’(敵國)에서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로 확대하는 법 개정을 추진했다. 지난해 11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형법 개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 법안심사 소위에서 통과됐다.
하지만 법사위 전체회의 상정을 앞두고 민주당이 “공청회를 열어 의견을 들어보자”면서 형법 개정안 상정을 미뤘다. 이후 12·3 계엄 사태로 관련 논의는 중단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국 중 간첩죄를 적국에만 한정한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 산업계에서는 한국이 ‘스파이 천국’이 되는 것을 막으려면 최대한 빨리 관련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박병열 산업연구원 글로벌산업실 부연구위원은 “기술 유출 방지를 위해 기업이 자체적으로 보안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나, 정부 차원에서 사전·사후 지원해 철저한 국가 기술 유출 방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