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정치] 빅데이터의 오염은 정치의 몰락을 가속화할 것이다
  • 성기노 기자
  • 승인 2025.04.08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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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여론은 신문 등의 레거시 미디어와 사람들의 입을 통해 '구전'
SNS 발달하며 온라인에서 정보와 여론이 유통되고 소비되기 시작
AI 시대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오염'되지 않은 빅데이터 확보가 관건
/자료=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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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스트리뉴스 성기노 기자] 정치는 여론의 쟁탈전이다. 여론을 선취하는 쪽이 이기는 게임이다. 그래서 여론은 정치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생존'의 요소 가운데 하나다. 사람들이 특정 이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가늠하고 그에 따르려는 노력은 정치인이 갖춰야 할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그렇다면 여론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SNS가 그리 활발하지 않던 시절에는 말 그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여론이 중요했다. 정보와 여론의 취득은 주로 신문 등의 전통 레거시 미디어와 '휴민트' (human(사람)과 intelligence(정보)의 합성어로,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얻은 인적 정보)를 통해 이뤄졌다. 

하지만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정보나 여론은 온라인 공간의 무한한 영역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취득, 교환을 할 수 있게 됐다. 온라인의 댓글을 통해 여론을 파악하는 사람도 늘어나면서 온라인은 여론의 생성과 발전, 소멸의 단계가 한번에 이뤄지는 '가상세계'가 됐다. 

그런데 이제는 AI의 시대다. AI라는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정보와 여론은 또 다른 단계로 진화, 발전하고 있다. AI는 곧 빅데이터를 말한다. 하지만 단지 데이터를 분석하는 도구로만 AI를 본다면 절반만 본 것이다. AI는 이제 정보를 ‘읽고’, ‘분석’하고, 심지어 ‘생산’하고 ‘조작’할 수도 있는 존재다. 여론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을 넘어, 여론의 방향을 ‘설계’하고 ‘유도’하는 능력까지 갖추게 된 것이다.

이처럼 AI는 더 이상 수동적인 플랫폼이 아니라, 여론이라는 흐름 속에서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새로운 플레이어가 되고 있다. 댓글을 달고, 기사 요약을 제공하고, SNS 알고리즘을 통해 특정 담론을 확산시키는 과정까지, 이 모든 곳에 AI의 손이 닿아 있다.

AI 시대에서 빅데이터는 정보의 질과 여론의 향배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점이 된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정치는 여론의 집합장이자 쟁투장이다. 대중의 감정, 관심, 분노, 기대를 읽어내고 그 흐름을 따라가면서 공감하고 여론이 흘러가는 방향을 선도하거나 이끌어가는 것 또한 정치의 중요한 본질이다. 

/자료=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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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정치인들은 시장에서, 골목에서, 신문 사설과 방송 뉴스에서 여론을 읽었다. 그러나 이제 여론은 거리에서 들려오는 장삼이사들의 떠들썩한 대화가 아니 수천만, 수억만 건의 데이터 셋 안에 감춰진 패턴이 되었다. 정치가 곧 ‘데이터 싸움’의 전장터가 된 것이다.

정치는 더 이상 사람들의 표정과 말에서 여론을 읽어내는 감(感)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이제 정치는 데이터를 해독하고, 알고리즘을 이해하고, AI와 협업할 수 있는 능력의 경쟁으로 바뀌었다. 누가 더 많은 데이터를 확보하느냐, 누가 더 정밀하게 분석하느냐, 누가 AI를 통해 더 설득력 있는 메시지를 설계하느냐가 정치의 승패를 좌우하는 시대다.

AI 시대의 정치는 곧 빅데이터를 둘러싼 정보 전쟁이다. 감정의 파동을 읽는 것도, 분노의 물결을 미리 감지하는 것도, 시대의 흐름을 선취하는 것도 이제는 데이터를 통해 이뤄진다. 정치가 여론의 전장이라면 이제 그 여론은 수치와 패턴, 알고리즘 위에 존재한다.

결국 정치는 데이터와 싸우고, 데이터를 통해 말하고, 데이터로 승부를 본다. AI가 정치의 '기술'을 바꾸고 있다면 빅데이터는 정치의 본질마저 재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빅데이터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정치영역에서 무엇보다 중요해진 것은 오염되지 않은, 신뢰할 수 있는 빅데이터를 확보하는 것이 되었다. 

편향된 알고리즘이나 왜곡된 여론, 조작된 정보 위에 세운 정치 전략은 결국 허상에 불과하다. 객관성과 중립성을 담보할 수 있는 데이터야말로 진짜 민심을 반영하고, 지속 가능한 정치 판단의 근거가 된다.

실제로 2020년대 초반 미국에서는 일부 정치 캠프가 SNS를 통한 여론 분석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트위터 민심’을 전체 민심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했다. 특정 해시태그나 트렌드가 대세인 줄 알고 전략을 짰지만 정작 투표장에 간 유권자들은 그 흐름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 것이다. SNS에서 수집된 데이터가 알고리즘에 의해 왜곡된 ‘에코 챔버’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2022년 프랑스 대선 당시 마크롱 캠프는 AI 기반 여론 분석 도구를 도입해 선거 전략을 설계했지만 그 과정에서 극우 성향 이슈가 과도하게 부각된 결과 오히려 중도층의 반감을 사는 역효과가 나타났다. 이는 데이터를 많이 수집했다고 해서 진짜 민심을 읽은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다.

2000년 제16대 총선 서울 구로을 합동연설회장의 모습. 이때만 해도 주로 신문 등의 전통 레거시 미디어를 통해 정보와 여론이 유통되던 시기였다. /사진=연합뉴스
2000년 제16대 총선 서울 구로을 합동연설회장의 모습. 이때만 해도 주로 신문 등의 전통 레거시 미디어를 통해 정보와 여론이 유통되던 시기였다. /사진=연합뉴스

비슷한 일은 한국에서도 있었다. 202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여러 정당은 유튜브와 포털 댓글, 트위터 트렌드 등 온라인 데이터를 분석해 민심 흐름을 예측하려 했지만 실제 투표 결과와는 큰 괴리를 보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정 후보에게 유리한 분위기로 보였던 유튜브 알고리즘 상의 여론은 알고 보니 일부 팬덤 커뮤니티의 ‘집단 댓글 작업’과 추천 알고리즘의 편향에 의해 과장된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선거 전략을 짠 캠프는 중도층 민심을 간과했고 그 결과 예측과는 다른 지지율 추이를 경험해야 했다.

또한 지방선거나 보궐선거 과정에서도 일부 후보들은 AI 기반 ‘감정 분석 툴’을 도입해 유권자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분석했지만 지역별·세대별 감성 코드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아 표면적인 감정 변화만 쫓는 ‘데이터 착시’에 빠지기도 했다.

AI 시대의 정치에서 중요한 건 단지 기술의 활용이 아니라 무엇을 기반으로 판단하고 움직일 것인가에 대한 철학과 태도에 관한 문제가 되고 있다. 정치의 도구가 바뀌었을 뿐 결국 ‘신뢰’라는 본질은 여전히 가장 강력한 자산이다.

정치의 전장은 바뀌었지만 그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건 여전히 ‘진짜 민심’을 읽어내는 능력이다. 그리고 그 민심은 깨끗한 데이터 안에 숨어 있다. 환경오염이 지구의 몰락을 가속화하듯 빅데이터오염은 정치의 몰락을 앞당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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